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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정신

여성의 몸무게와 정체성, 식욕과 성욕에 관해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中)

여성의 몸무게와 정체성, 식욕과 성욕에 관해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中)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지음

 

정희진 작가님의 <페미니즘의 도전> 

 

평소 꽁기 꽁기하게 마음 속으로만 불편해 했던 상황들이

왜 불편하고 불쾌한지에 대해 속 시원히 이야기해주고

설명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상세히 풀어준다.

 

불편한 걸 불편하다고 말 할 수 있는

왜 불편한지 논리 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게 잘못된 줄 모르고 있는 어린 이들에게

내가 이 글을 기록함으로써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인지할 수있도록,

현상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동기가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아주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지만 공감하는 내용들

일정 부분 발췌합니다.


이 글은 주류와 비주류, 소수와 다수의 경계는 항상 흔들리고 다시 그어지고 지워지기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누구도 어딘가에 영원히 속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 것이다. 

 

'다른 목소리'는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풍요롭게 해주며 자기 중심주의를 돌아보게 한다. 또한 모든 사람은 '다른 목소리'의 잠재적 주인공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성주의다. 여성주의는 양성 평등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사회정의와 성찰적 지성을 위한 방법론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여성주의를 공부해서 '손해'볼 일은 없다.

 

특히 논쟁이나 글쓰기, 말하기에 관심 있는 이라면 페미니즘을 공부하길 권한다. 논쟁은 승부가 아니라 참여하는 사람의 입장(지식)과 그러한 입장이 형성된 과정을 교환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논쟁이 한국 사회의 'TV토론'이다.) 지식 형성 과정을 상호 교환하면 논쟁은 그 자체로 공부가 되지만, 경험하다시피,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부를 포기(?)하고 논쟁에서 '이기고' 싶다면, 상대방의 앎의 경로(상대방 논리의 전제)를 파악하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배 담론 내부에서 지식을 획득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모른다. 페미니즘은 지식의 형성 과정, 권력의 작동 지형과 역사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1부 - 3장. 다이어트와 섹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몸무게는 절제와 인내력 등 자기관리의 지표일 뿐 아니라, 여성의 인격과 정체성의 기준이 된 지 오래다. 물론 뚱뚱한 남성도 환영받지는 못하지만, 몸무게가 일상적으로 남성의 삶을 통제하거나 규율하지는 않는다. 여성의 체중은 곧바로 취업·결혼·대인관계·자존감으로 연결되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몸무게는 절제와 인내력 등 자기관리의 지표일 뿐 아니라, 여성의 인격과 정체성의 기준이 된 지 오래다. 물론 뚱뚱한 남성도 환영받지는 못하지만, 몸무게가 일상적으로 남성의 삶을 통제하거나 규율하지는 않는다. 여성의 체중은 곧바로 취업·결혼·대인관계·자존감으로 연결되는,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식욕은 통제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들은 폭식을 하더라도 집단적으로 여럿이 모여 먹고 마신다. 

 

하지만 여성에게 폭식은 수치로 여겨지기 때문에, 먹더라도 밤에 혼자 먹는다. 

 

또한 남성의 식욕과 성욕은 무관하지만, 여성의 식욕은 곧 성욕으로 유추된다.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이 음식을 많이 먹으면 어머니나 친구 등 주변 여성들이 나서서 협박에 가까운 걱정과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

 

식욕과 성욕은 모두, 혐오스런, 최소한 바람직하지 않은 여성성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성행위와 음식 만들기는 가부장제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여성에게만 부과되는 노동이다. 즉, 음식과 성을 노동으로 강요받는 사람은 여성이지만, 여성은 음식과 성을 즐길 수도 없고 욕망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남성은 수 천년전 부터 생식이나 쾌락, 자기 실현 등 다양한 차원에서 성을 즐겨왔지만, 여성의 성은 지금까지도 출산의 영역에 한정될 것을 강요받는다. 여성의 성욕이 부계 가족 유지-아들낳기만을 위해 허용되듯, 여성의 식욕이 찬양되는 시기는 임신했을 때뿐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현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먹는 양을 조절하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다. 

다이어트는 여성 문제 중에서도 여성의 '주체적 종속'이 가장 심각한 영역이다. 

다이어트 성공은 여성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성취의 하나로 간주된다. 

왜 여성의 굶주림은 사회적 보상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어째서 여성의 몸은 음식과 몸무게의 전투가 벌어지는 격전지가 된 것일까? 

 

왜 여성은 마치 성욕을 느낄 때처럼, 초콜릿 케이크를 보고 식욕을 느낄 때 죄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폭식이나 거식은 언어화되지 못한 여성 문제가 머무는 도피처, 연막인 것이다. 다이어트는 '아름다움'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자아 존중감과 관련된 문제이다. 거식은 여성의 자기혐오로 인한 몸의 '축소 열망'(소멸은 죽음) 이며, 폭식은 남성의 투사(投射,남 탓으로 돌리는)와 대비되는 여성의 내사(內射,자기 탓으로 돌리는)의 일종의 우울증으로서, 사회가 싫어하는 여성이 되겠다는 자기 처벌이다.

 

 

남성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동시에 달성하기 힘든 이중 메시지인 경우가 많다. 음식을 만들되 먹지 말라, 말라깽이가 되되 가슴과 엉덩이는 풍만하라, 정숙하면서도 섹시하라... 식욕, 성욕, 수면욕은 인간의 3대 욕구가 아니라 남성의 3대 욕구인 셈이다.

 

 

흔히 여성은 '보는 주체'가 아니라 '보여지는 대상' 으로 간주된다. 사회는 여성의 몸이 어떻게 '보여져야' 하는지에 몰두할 뿐, 여성이 자기 몸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여성은 남성의 눈으로 자신의 몸을 만든다. 물론, 요즘 세상에 다이어트나 화장 등 외모 관리를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 촌스럽게 말하는 여성은 거의 없다. 대개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 라고 말하며, 실제로도 그렇다. 그러나 그 '바람직한 자기 이미지'는 미디어 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남성은 여성만큼 '자기 만족을 위해' 다이어트와 외모 관리에 몰두하지 않는다.